자유영혼

웅천역은 이 날 장항선의 계획된 마지막 답사역이라 그런지 한결 수월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해야할까...

 

청소역에서 무궁화호의 교행을 보고 웅천역에 도착했을 때 웅천역에서 받은 인상은 정겨움이었다.

 

○ 웅천역의 역사

 

- 1931년 8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 1982년 4월 19일 역사 신축 준공

 

- 1988년 12월 20일 운전취급방식을 연동폐색방식으로 변경

 

- 1991년 9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

 

- 2006년 11월 15일 화물 취급 중지

 

 

이미 오래전부터 영업을 시작해온 웅천역은 1982년 현재 역사를 준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보령의 명소 중에 하나인 대천해수욕장과 달리 번잡하지도 않으면서 편안한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무창포해수욕장이 있는데, 무창포해수욕장을 이용하기 위해서 웅천역을 이용하는 게 더 가까운 편이다. 물론, 웅천역에서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가려면, 웅천역에서 내려 시내버스 등 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무창포의 내음이 전해지는 것처럼 웅천역은 내게 더 없이 편안한 존재였다.

 

 

 

현재 코레일의 신 CI 체계가 적용됨에 따라 역명판, 역간판 등이 시대에 순응하고 있으나 장항선의 비전화구간에 있고, 과거 소화물을 취급했던 장소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마치 신구조화를 이룬다고 해야할까. 신구조화를 이루면서도 거북함보다는 조화로움을 전해주고 있는 듯 하다.

 

 

 

 

웅천역의 광장 방향에서 찍은 웅천역의 첫번째 파노라마 사진인데, 찍은 사진도 만족할 뿐만 아니라 장항선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청소역 못지 않게 웅천역도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이전에 청소역과 웅천역을 보며 소중한 가치를 지닌 역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사실에 서운하기만 하다.

 

 

 

 

웅천역의 역사로 들어서자마자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구수하기로 소문난 충청도사투리로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규모가 큰 관리역, 중추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풍경을 시골에 있는 보통역에서는 언제든지 느낄 수 있다.

 

사람냄새가 난다고 해야할까? 시골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 같은 것 말이다.

 

 

 

 

웅천역은 대천역과 다르게 G-Train으로 불리는 서해금빛열차 1왕복을 제외하곤, 장항선을 운행하는 모든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정차한다. 많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다. 이용객 역시 꾸준한 편에 속한다.

 

지금 사진을 정리하고, 포스팅을 하는 시점에서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서대전이다. 2016년 12월 9일 시간표 대개정이 있기 전까지 장항선을 경유하여 대전까지 기차여행을 할 수 있던 기차편 1왕복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궁화호 1556과 무궁화호 1563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탑승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이제는 서대전을 가기 위해서 익산역으로 가서 "환승"을 해야만 한다. 사실, 아무리 추억과 활용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시간이 적게 걸려야 하고, 비용도 적게 들어야 하는 효율성의 논리앞에 다 무용지물일 뿐이다.

 

 

 

 

매표창구 역시 어느 시골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표를 담당하던 직원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모자이크를 처리한 점 깊은 양해를 구한다.)

 

 

 

 

웅천역 한켠에 石공예홍보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웅천역 나름대로 특색이 마련되어 있어 색다른 맛이 있다. 각종 석공예품이라 돌로 만들었을 터인데, 돌로 어떻게 저렇게 멋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란 생각에 감탄하기도 하고, 자연을 가다듬었던 장인들의 솜씨를 보며 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에 역의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것 같다. 

 

웅천역을 보며 역이 단순히 거쳐가는 공간만이 아닌 역의 특색을 살려 문화공간으로 좀 더 승화시켜나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웅천역은 지방에 있는 시골역들의 소중한 참고서라 할 만 하다.

 

특히 시골역은 단순히 거쳐 지나가는 곳만이 아닌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춘 존재들이다. 

 

비록 적은 공간일지라도 역의 한 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춰볼 때 웅천역은 정말 좋은 역이다.

 

 

 

 

웅천역의 맞이방 내부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알맞다. 기차를 기다리거나 잠시 쉬어가기 위해 모여 담소를 나눈 등 정겹고 편안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겹고 편안함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가 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웅천역의 소중한 정취를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기에 웅천역의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웅천읍의 마을 풍경이 궁금해져 역사 광장으로 나와봤다.

 

 

 

 

역사 앞 정자부터 그야말로 평온한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동네도 포근하고, 덩달아 내 마음도 포근해진다.

 

 

 

 

웅천역 광장에서 선로 방향으로 웅천역의 역사를 담아본다. 웅천역이 전해주는 넉넉한 인심처럼 파노라마 사진도 덤으로 추가했다.

 

 

 

 

웅천역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무궁화호 기차를 기다리며 광장 방향의 파노라마 사진을 또 만들어봤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기차를 기다리는 소박한 풍경들이야말로 도시에서 관리역에서 중추역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풍경들이다. 또한, 역의 곳곳이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는 분위기다. 기차여행도 하고, 웅천역 주변에서 자연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웅천역에서 천안역 가는 승차권을 웅천역 창구에서 구매하고, 입장권 발권도 같이 부탁을 드리니 기꺼이 발권해주시던 역직원분의 넉넉한 인심까지 이런 소중한 것들을 과연 다른 역에서 또 느낄 수 있을까 싶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시골역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특색을 가진 기차역이라는 공간에서 위안을 받고 힐링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시골역의 가치를 만끽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청소역은 한 방송사의 추석 특집 단막극이었던 "아버지 당신의 자리"로 널리 알려진 역이다.

 

꼭 "아버지 당신의 자리"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청소역은 장항선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한국철도의 숨겨진 또다른 보물로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역이다.  

 

 

○ 청소역의 역사

 

- 1929년 12월 1일 진죽역(眞竹驛)으로 배치간이역으로 영업 개시

 

- 1958년 9월 1일 보통역으로 승격

 

- 1961년 3월 12일 현 역사 착공

 

- 1961년 11월 9일 현 역사 준공

 

- 1988년 12월 1일 진죽역에서 청소역으로 역명 변경

 

- 1990년 1월 1일 소화물취급 중지

 

- 2006년 12월 4일 청소역사 등록문화재 305호로 지정

 

- 2013년 8월 1일 승차권 차내취급역으로 전환

 

 

청소역은 청소역의 역사처럼 청소역의 탄생부터 존재, 그리고 역사(驛舍)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역사(曆史) 자체라 하겠다.

 

이날 청소역의 답사는 정말 만족 그 이상이었는데, 뒤이어 사진으로 나오게 되겠지만, 청소역의 역사(驛舍), 청소역 맞이방 내부에 있는 애드몬슨 승차권, 청소역 주변 마을과 건널목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거기에 이날 내 마음을 알아준 것처럼 청소역에서 찍었던 사진들도 내 마음속에 쏙 들었다. 다시 말해, 옛 세월의 흔적, 그리고 장항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이 바로 청소역이었다.

 

이렇듯 청소역은 장항선의 보물이자 장항선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조화란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청소역은 옛 모습을 가지런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과 자연스롭게 또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야말로 이상적일 것이고, 청소역은 이에 가장 부합하는 역이 아닌가 싶다.

 

비록 옛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시대적 흐름에도 거스르지 않는다.

 

조화란 말이 바로 청소역을 함축하는 하나의 단어라 할 수 있다.

 

 

 

 

청소역은 2006년 12월 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역사적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청소역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역이자 1929년에 개업하여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서 살아 숨 쉬고 있고, 비록 근미래에 복선전철화가 되어 영업상 폐역이 될지라도 묵묵히 내색없는 아버지와 같은 든든한 존재로서 때론 장항선의 산증인으로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청소역이 위치한 보령시의 상징인 머드를 형상화한 캐릭터를 곁들여 청소역에 대한 기본지식과 설명을 통해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청소역의 역간판부터 출입문 안내판까지 과거 철도청 시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역사 광장앞 음식점과 매점, 그리고 택시승강장까지 청소역이 전해주는 모습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정겹다. 삭막하고 지친 일상속 청소역에서 정겨움을 만끽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역사 속으로 추억 속으로 사라진 에드몬슨 승차권이 액자에 담겨 있어 청소역의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쉽게 접하기 힘든 검표가위, 전호깃발, 집표도장도 청소역의 알림판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다른 블로거의 답사기를 통해 파악한 바 있었는데 아쉽게도 없었다. 마침 역 구내를 순찰하던 역직원에게 영문을 물어보니 잘 모르겠지만, 분실 및 도난 등의 이유로 치우지 않았을까란 의견을 말해주었는데, 현재 승차권 차내취급역으로 전환된 청소역의 상황을 볼 때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표가위, 전호깃발, 집표도장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에드몬슨 승차권과 운치 있는 긴 벤치, 역사 곳곳에 남아있는 세월의 자취만해도 청소역은 장항선의 철도박물관이라 칭할만 하다.

 

 

청소역 내부에는 보령시의 명소인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오천항, 오서산 등의 사진들이 걸려있어 청소역뿐만 아니라 보령시의 여행지를 사람들에게 적극 권하고 있는 듯 했다.

 

 

 

 

 

2013년 8월 1일 청소역이 승차권 차내취급역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역 운영 개선 및 경영효율화가 목적이라곤 하나 그래도 내심 섭섭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결국 청소역은 승차권 차내취급역으로 전환되면서 역직원들이 3조 2교대로 운전취급만 담당하고 있다. 인접역인 광천역과 대천역에서 승차권을 예매할 것으로 안내하고 있으나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꽤 불편함을 느낄 듯 싶다. 그래도 무인화의 칼날을 피해갔으니 다행이라는 현실에 안도해야하는 상황이니 웃프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역 운영 개선 및 경영효율화의 어두운 단면을 나타내주는 듯해서 씁쓸함만 느끼게 되었다. 

 

 

 

 

매표창구에서 승차권 예발매를 취급했다면 더욱 정겨웠을 상상을 마음속에 넣어둔다. 매표창구 옆에는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가 액자로 조촐하게 담겨있었다.

 

 

 

 

얼핏보면 청소역을 무인역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래도 청소역은 엄연히 역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보통역이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이야말로 이날 청소역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청소역에서는 전철화가 되어 있지 않아 다소 거추장스러워 보일 수 있는 전선들이 보이지 않아 사진을 담기가 한결 수월했다. 미세먼지가 아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자연은 처음에 모든 것을 내주지 않는가보다. 사실, 처음에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리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게 어디 있을까?

 

다음에 청소역을 들렀을 때를 상상해보며 청소역을 꼭 한번 다시 들리기로 다짐을 해본다.

 

 

 

 

광천역 방면으로 놓여진 승강장 위의 가로등이 더욱 청소역의 정겨움을 배가시켜주는 듯했다. 다음에 청소역에 올 때는 가로등을 벗삼아 기차와 사람이 조화되는 사진을 담기로 다짐해본다.

 

 

 

 

과거 화물을 취급했던 화물승강장 위에는 선로와 이름 모를 벽돌들이 놓여있었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는지 듬성듬성 잡초들이 자라나 있었다.

 

 

 

 

청소역의 역명판만큼은 시대를 앞서간다. 현재 코레일 CI체계로 개편된 역명판을 채용하고 있었다. 미세먼지로 가려졌지만, 청소역에서는 오서산을 바라볼 수가 있다. 청소역에서 오서산의 사시사철을 담아보고 싶은 욕구가 요동친다. 오서산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사뭇 궁금해진다.

 

산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겨운 마을, 철도박물관에서나 볼만한 철도의 소중한 유산들이 시골역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청소역이야말로 가장 조화롭고 이상적인 시골역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청소역이 지닌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환산불가일 것이고. 

 

 

 

 

웅천역으로 떠나는 열차시간이 다가오면서 청소역의 역사 전경과 청소역 주변 마을을 사진에 담아보기로 했다. 청라, 대천 시내방면으로 가는 도로와 마을,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역사로 숨쉬고 있는 청소역의 역사 전경을 각각 플랫폼과 광장방향으로 담아본다.

 

청소역에서 담았던 사진 하나 하나가 포스팅하는 지금 새롭게 내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청소역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청소역에서 보고 담았던 사진들이 내가 기대한 이상이라 정말 만족 그 이상이었다.

 

 

 

 

청소역의 진정한 마지막 하이라이트! 청소역에서만 볼 수 있는 무궁화호의 교행이다. 청소역을 떠나 웅천역으로 가기 전 운전취급을 보던 역직원이 역무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열차가 들어오니 조속히 플랫폼으로 갈 것을 재촉했는데, 바로 청소역에서만 볼 수 있는 무궁화호의 교행때문이다. 용산행 무궁화호 1558과 익산행 무궁화호 1557이 열차 다이아상 교행하는 관계로 청소역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마치 내게 다음에 또 오라는 당부와 더불어 청소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는 소중한 선물과 같았다.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을 내 눈으로본 게 믿기지 않았다. 이 날 청소역의 답사는 100점 만점에 10,000점이다.

 

결국 시간이 되어 청소역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웅천역으로 가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는다.

 

 

오래전 추석때 단막극으로 유명 방송사에서 방영된 「아버지 당신의 자리」의 아름다운 글귀와 더불어 이날 청소역에 다녀온 소중한 추억을 바탕으로 다음번 청소역을 방문했을 때 청소역의 숨겨진 참모습을 만끽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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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당신의 자리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청소역


광천역과 대천역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간이역이다.


번화한 두 역사와는 달리 이제는 간간히 오가는 햇볕과 바람만이


숨을 고르고 가는 쇠락한 간이역으로 남아있다.


7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 초록의 기와는 하늘을 얹고는


그저 쓸쓸하다.


한때는 많은 이들이 오고갔을 역.


시대는 변하는데 변하지 못하는 간이역은 하나 둘, 폐역이 되어간다.


기차는 지나건만 멈추어 주질 않는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아


있어도 있지 않은 존재.



늙어감도 그러한 것 같아 서럽다.


하루가 다르게 낡아가는 것처럼......


아무도 다가와주지 않는 고독.



쓸쓸함과 헛헛함을 그저 그러해야만 하는 듯 삭히며 짐 지고 가는 노인.


버림받고 있는 간이역처럼


자식에게 등 돌려진 자신도 閉驛(폐역)을 앞둔 그와 다르지 않다.



드라마는 쇠락한 청소역을 무대로 간이역과 인생을 함께한 노인의


상처 깊은 가족사를 통해


함께 견뎌내고 함께 건너가는 힘.


가족 간의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가게 해주는 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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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선으로 접어든다.

 

장항선의 처음을 여는 역이 판교역이었다.

 

판교역, 청소역, 웅천역으로 이어지는 장항선 간이역 답사기의 첫 시작이 바로 판교역인 셈이다.

 

개인 사정상 일정상 판교역, 청소역, 웅천역을 한번에 답사해야 했기에 다음에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큰 역들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필자는 기차여행다운 기차여행으로 영동선, 태백선이 아닌 주저없이 장항선을 꼽는다. 비록 복선전철화를 앞두고 있기는 하지만, 용산역을 출발해 천안역까지 도시적인 풍경을 접하고, 천안역 이남으로 충청도의 서해 바다와 갯벌을 보일 듯 말 듯 보여주며 논과 산으로 이어지는 풍요로운 자연 경관을 보여주다가 장항역을 지나 군산역으로 들어서면 익산역까지 이어지는 새만금의 광활한 풍경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즉, 장항선이 가진 매력은 디지털적인 시각과 아날로그적인 시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특히, 수도권과도 거리가 멀지 않아 영동선이나 태백선처럼 기차여행을 하는 데 있어 큰 부담을 주지않는 점도 큰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에다 유일하게 새마을호의 정기노선이 운행하는 곳이 바로 장항선이라는 점도 큰 몫을 차지한다.

 

 

 

○ 판교역의 역사

 

- 1930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 1984년 10월 31일 역사 신축

 

- 1991년 9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

 

- 1991년 9월 15일 소화물 취급 개시

 

- 2006년 5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

 

- 2008년 11월 28일 장항선 이설과 함께 현 역사로 이전

 

 

 

역사로 보듯 판교역은 어느 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평범하게 묻어간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판교역이 특별한 건 과거 아날로그를 뒤로 한 채 디지털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처음 판교역을 접했을 때 문화충격을 겪었다. 마치 수도권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기에 그렇다.

 

판교역의 옛 역사는 아기자기함이 담겨있는 역사 중에 역사였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새로 생긴 현재 역사는 아기자기함을 뒤로 한 채 뭔가 세련됨과 동시에 앞서가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 날 오전 대천역에서 탑승한 무궁화호 1553을 타고, 막 판교역에 도착하자마자 판교역의 모습을 담아보게 된다. 판교역에서 승하차가 끝나고 여객전무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 꼭 담고 싶었던 사진 중에 하나였는데, 공교롭게도 판교역에서 담게 되었다.

 

내렸을 때부터 판교역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수도권에 있는 전철역에 왔다고 느껴질 정도로 판교역은 과거의 아기자기함을 뒤로 한 채 현대화가 된 채로 거듭나 있었다.

 

 

 

 

판교역에서 몇 명의 사람을 내려주고, 또 몇 명의 사람을 태운 장항선 무궁화호는 마지막역인 익산역으로 유유히 떠나고 있었다. 기차도 사람도 목적지에 도착하여 또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난다. 인생이란 기차여행처럼 수많은 군상들을 만나고, 정해진 목적지에 도착하여 또다른 목적지로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 아닐까 싶다.

 

 

 

 

역명판도 여느 장항선 소재 역처럼 지주식 역명판이 아닌 달대식 역명판을 채용하고 있는 것부터가 남다른 존재라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것 같다. 수도권에서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것도 일반 로컬선에는 나름 희소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는 걸보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다시금 느껴진다.

 

 

 

 

세련됐다고 느껴질만큼 간이역스러움보다는 보통역 내지 관리역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

 

 

 

 

판교역으로 가려면 한 단계를 거쳐 또다른 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같은 장항선에 위치한 군산역과 역사 구조가 꽤 유사한 편이었다. 다만, 군산역과 달리 역사 규모와 구조가 단촐한 편이 차이라면 차이라 하겠다.  

 

 

 

 

세련됨과 디지털이 대세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자 사실이겠지만, 아날로그가 그리워지고, 디지털을 가장한 획일화가 뭔가 역이란 존재가 그냥 거쳐가는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 같아 씁쓸함을 숨길 길이 없어보인다. 특색을 간직한 역과 뭔가 특색을 가진 역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램이자 마음이다. 

 

 

 

 

판교역의 표 사는 곳이자 판교역의 맞이방이 되겠다. 다른 로컬선의 역들과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판교역 맞이방에 있는 목재의자들처럼 판교역의 맞이방이 옛 판교역의 맞이방처럼 마을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사랑방이 되었으면 하는 감상에 젖어들지만, 새롭게 이설된 판교역은 그걸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뒤에 나오겠지만, 주변에 민가와 마을이라고는 없어서 마을까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교역의 시간표는 다른 장항선들과 달리 열차시간표가 꽤나 튼실한 편이다. G-트레인 서해금빛열차, 새마을호와 익산, 서대전 방면 무궁화호 편도 1편을 제외하고는 장항선을 운행하는 9왕복 수준의 무궁화호가 거의 다 운행하니 대야역, 청소역과 달리 열차시간표는 잘 갖춰진 편이라 하겠다. 

 

판교역에서 청소역으로 가기 위해 승차권과 판교역의 입장권을 역직원에게 구매 및 발권하였다. 간이역이라 생각되는 시골역들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역직원들이 꽤 친절하게 승객들을 맞이해준다는 점이 간이역에서 근무하는 역직원들이야말로 간이역의 숨은 보석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이날 판교역에서 근무하던 역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줘 간이역의 인심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실내를 벗어나 판교역의 광장으로 나와본다. 이 날 미세먼지 탓에 하늘이 뿌옇다. 미세먼지와 늦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아침의 선선함을 느끼기는 어려운 날씨였다.

 

 

 

 

판교역의 기둥형 폴싸인이 판교역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진에 나와있는 것처럼 주변에 민가가 없어 판교마을이나 장항, 서천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나 택시 등 다른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하는 애로사항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옛 판교역의 정겨움은 물론 이용객의 감소까지 이끌어내고 말았다.

 

대천여객 시내버스가 사진에 나오는 데, 보령시에서 웅천역을 경유하여 서천 판교역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라고 한다. 대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판교역까지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다. 

 

황량함 속에서도 판교역의 기둥형 폴싸인과 더불어 푸른 나무와 아기자기한 의자가 어우러져 판교역의 진정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만족을 느꼈다. 판교역의 진정한 내면과 사람이 조화를 이룬다면, 판교역의 내실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세련된 출입로를 지나 웅천 방향 플랫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5~6명 정도 되보이는 이용객들이 있다고 하지만, 옛 판교역의 명성과 추억에는 부족하기 그지없다. 판교역에도 다른 간이역들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조금만 관심을 두면, 간이역도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부르기에 손색없는 곳이니까.

 

 

 

 

뿌연 날씨처럼 판교역의 미래도 간이역의 미래도 뿌옇기만 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어두워지기만 한다. 간이역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날씨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빠름을 추구하는 게 인지상정이 되어가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느림의 미학을 미덕삼아 사람과 사람 속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가져본다.

 

2015년 모 방송사에서 방영된 바 있는 서천 판교마을의 '느리게, 더 느리게'란 말은 판교역을 상징해주는 말이자 빠름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에게 통렬한 명제를 던져주고 있다.

 

빠름보다는 때로는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보다 더욱 편안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판교역의 역사는 세련됨을 갖췄지만, 판교역의 내면은 느리게, 더 느리게 여유를 갖고 흘러가는 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우리 인생도 여유를 갖고 느리게 더 느리게 흘러가는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휴일이던 한글날을 맞아 머리를 식힐 겸 정동진역을 다녀왔다.

 

이 날 한글날을 마치 반겨주듯 하늘도 맑았고, 바다와 날씨 모두 푸른빛을 보여주었다.

 

사실, 정동진역은 간이역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어중간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과거야 어엿한 바다를 끼는 아름다운 간이역 그 자체였지만, 히트를 쳤던 드라마가 대중에게 나오며 간이역의 범주에서는 벗어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간이역이면 어떻고, 간이역이 아니면 어떠랴...

 

역직원이 있고, 열차를 탑승하는 사람들도 있고, 역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가 되어 사람을 맞이하는 온전히 역으로서 역할을 다하면 그뿐이 아닐까?

 

 

 

○ 정동진역의 역사

 

- 1962년 11월 6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 1962년 11월 11일 현재 역사 준공

 

- 1988년 1월 1일 소화물차 취급 중지

 

- 1996년 1월 1일 여객 취급 중지

 

- 1997년 3월 15일 플랫폼 구조 변경 및 여객 취급 재개

 

- 2002년 7월 16일 태백선 새마을호 열차 정차 (2006. 10. 31일 까지)

 

- 2005년 9월 1일 전철화 개통

 

- 2005년 9월 30일 화물 취급 중지

 

- 2014년 9월 15일 원주 ↔ 강릉선 공사로 인하여 임시 시종착역 기능 수행 

 

 

 

 

 

 

정동진역의 기둥형 역명판이 반겨주고 있었다. 기둥형 역명판을 뒤로한 푸른 바다에서 내는 푸른 내음을 전해주며 마치 날을 잘 잡았다고 반겨주는 듯했다.

 

 

 

 

소위 말하는 근성열차로 불리는 1691 정동진 ↔ 부산의 무궁화호 열차가 떠난 뒤였다. 어딘가로 떠나는 이들을 태운 무궁화호 열차는 출발하고, 정동진역을 여행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역을 둘러보거나 푸른 바다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듯했다. 푸른 날씨와 푸른 바다를 보며 그간 나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시나브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렇듯 정동진역은 바다와 하늘, 더 나아가 자연을 사람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존재인 듯 싶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리는 소나무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정동진역하면 떠오르는 소재 중에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다. 정동진역을 떠올려주는 소나무의 존재가 바다와 하늘, 그리고 자연과 꽤나 잘 어울렸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던 태양이 비추며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정동진역의 상징이자 정동진역을 크게 도약시킨 모래시계 소나무이다. 그렇다. 바로 정동진역을 크게 부흥시킨 존재이자 정동진역을 방문하면 둘러보게 된다는 모래시계 소나무이다. 정동진역을 부흥시킨 드라마가 바로 박상원씨, 고현정씨, 최민수씨가 출연한 모래시계이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고현정씨가 플랫폼으로 나가는 장면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비록 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지만, 내가 찍은 사진치고는 꽤나 잘 나온 것 같아 지금도 꽤 마음에 드는 사진 중에 하나이다.

 

모래시계 소나무와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하이라이트로 손꼽아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사진이라 하겠다.

 

과거 비둘기호만 정차하던 정동진역이 모래시계를 만나 통일호, 무궁화호, 더 나아가 새마을호와 관광열차인 바다열차까지 정차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여행지로 각광받는 곳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란 말이 바로 이런 것인가보다.

 

상전벽해의 이면에는 간이역이라는 이미지와 정취가 다소 퇴색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역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모래시계 소나무만큼은 아니지만, 위에 찍힌 이름 모를 소나무도 마음에 든다. 이 날은 마치 내게 정동진역의 정취를 만끽하도록 마련해준 자리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역의 곳곳에는 뒤이어 나올 시비와 증기기관차를 형상화한 대리석이 놓여있었다.

 

 

 

 

정동진역의 역사에 새로 건립된 맞이방이 다소 이질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비록 전철화가 대세라지만, 그래도 전선이 뭔가 풍경을 제약하는 요소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 같다.

 

 

 

 

역명판은 코레일의 기본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2007년 7월 25일 CDC차량을 개조하여 탄생한 바다열차의 안내판이 강릉역의 공사 관계로 지금은 정동진역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열차는 영동선의 지선으로 여겨지는 삼척선을 이용하여 삼척역까지 가는 열차라 나름 특별하고 각별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삼척역의 몇 안되는 여객열차 중에 하나가 바로 바다열차이니까. 

 

 

 

 

정동진역의 또다른 상징인 정동진 시비이다.

 

신봉승 시인의 정동진이라는 시인데, 정동진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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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신봉승

 

벗이여,

 

바른동쪽

 

정동진으로 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 해를 보았는가.

 

 

큰 발원에서

 

작은 소망에 이르는

 

우리들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저 불타는 태초의 햇살과

 

마주서는 기쁨을 아는가.

 

 

벗이여,

 

밝은 나루

 

정동진으로

 

밀려오는 저 푸른 파도가

 

억겁을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처연한 몸짓

 

염원하는 몸부림을

 

마주서서 바라보는 이 환희가

 

우리 사는 보람임을

 

벗이여, 정녕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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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의 진정한 상징인 정동진역의 역사이다. 근무하던 역직원에게 들은 바로는 지금 사진으로 보여지고 있는 정동진역 역사의 맞이방은 정동진역 미술관으로서 역할이 바뀐 상태이고, 과거 역무실은 여객전무 등 승무원들이 대기하고, 운전취급 등 역무 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정동진역의 마지막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 광화문의 정동쪽 정동진을 상징하는 푯말이다. 모래시계와 더불어 정동진역을 더욱 부각시키는 존재라 하겠다.

 

 

 

 

정동진역의 옆에는 레일바이크가 활성화되어 운영되고 있는 데 휴일을 맞아 사람들이 레일바이크에 여념이 없었다. 푸른 자연을 만끽하며 레일바이크를 탄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정동진역의 곳곳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기존에 있는 존재들과 함께 보다 동화될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라 적고 욕심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사진이야말로 과거 정동진역이 순수한 간이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아닐까 한다. 어떻게 보면 정동진역이 정동진역 다운 사진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이처럼 정동진역의 옛 맞이방은 정동진역 미술관으로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 안켠에 있는 고현정씨가 플랫폼으로 나가는 장면을 그림으로 보여주며 정동진역이 모래시계의 촬영지이자 모래시계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라 하겠다.

 

천고마비의 가을이라는 계절과 푸른 내음이 흘러나오는 푸른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며 몸도 마음도 푸름이 가득해지는 것 같아 꽤 맑고 상쾌한 시간이었다.

 

늘 이야기하는 거지만, 자연과 사람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역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역 답사기를 꽤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는 것 같다.

 

이번 포스팅의 주연인 분천역을 답사했던 시기가 작년 6월 여름 초입에 들어가던 날씨였는데, 포스팅을 하는 지금은 겨울이라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비록 답사 당시에는 여름이었지만, 사실 분천역은 어느 역보다 겨울이 잘 어울리는 역이다.

 

영동선의 역들이 그렇듯 분천역 역시 아름다운 역으로 손꼽히는 역 중에 하나일 것이다.

 

 

 

○ 분천역의 역사

 

- 1956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개업

 

- 1957년 3월 3일  현재 역사 신축 준공

 

- 1994년 1월 1일  소화물 취급 정지

 

- 1997년 3월 1일  승강장 설비 개량

 

- 1997년 9월 10일 시설관리반 신축 준공

 

- 2008년 11월 1일 화물취급 중지

 

- 2013년 4월 12일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 운행 개시

 

- 2013년 5월 23일 스위스 마테호른 고트하르트 반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 체결

 

위키백과에서 참고한 분천역의 역사인데, 영동선의 역사가 으레 그렇듯 주변 임기역, 현동역과는 큰 차이가 없는 편이다.

 

직접 답사하진 않았지만, 많은 답사기들을 사진으로 봤는데, 분천역의 역사 외관이 인접역인 임기역, 현동역, 같은 영동선에 있는 봉성역과도 꽤 흡사하여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구조다.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맺은 뒤 분천역의 외관이 좀 더 고풍스러워지고, 산타마을이라는 별칭처럼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형태로 역이 바뀌었는데, 자매결연 전에는 분천역의 역사는 임기역, 현동역, 그리고 봉성역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고 한다. 역간판마저도 코레일의 기본양식이 아닌 과거 오래전에 사용됐을 법한 간판으로 바뀌었다. 경전선 득량역도 분천역과 같은 형식의 역간판일 것이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화가 되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분천역에 와서 다시금 깨닫는다.

 

역 주변으로도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것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신구조화란 이런 것일까? 과거 오래전부터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시골마을의 풍경과 자매결연 뒤 아기자기 꾸며진 조형물이 최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부터 아름다운 역과 마을에 어울리는 조형물들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듯 하다.

 

사실, 분천역도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 전까지 무인화가 거론되던 역 중에 하나였다. 

 

무인화가 거론되던 역이 스위스의 체르마트와 자매결연을 맺고, V-Train과 O-Train이 정차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하루 열 명 남짓 이용하던 역이 북새통을 이루던 역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란 표현이 시의적절할 것이다.

 

회생의 전기를 마련한 분천역과 달리 임기역, 현동역은 V-Train과 O-Train의 통과에 이어 2013년 10월 21일부터 차내취급역으로 전환되더니 2013년 11월 7일부로 한시적으로나마 근무하던 직원들이 철수하며 무인화의 길로 빠져버리고 만다.

 

 

 

 

역사 외관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역사 주변은 물론이고, 역사 내부도 그야말로 산타마을과 봉화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겨울에 걸맞는 분위기로 역사 내부도 꾸며져 있었다.

 

분천역과 득량역이야말로 특화된 주제를 바탕으로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간이역들의 부흥에 필요한 모범답안이자 참고서가 되고 있다.

 

도로가 발달하고, 일반열차의 비효율성이 부각되며 간이역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간이역의 본질을 더욱 부각시키며,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정취와 각박한 세태 속에서 진정한 힐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힐링은 꼭 필요하고, 특색있는 간이역들이 하나둘 늘어나 힐링의 전도사로 이바지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램이다.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출발하기 전 어떤 아주머니들이 셀카를 찍으며 즐거움과 힐링을 만끽하고 있는 것을 보며, 간이역의 본질과 역할이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되새겨본다.

 

포스팅을 하고 나서 쓰는 거지만, 단순히 사진촬영과 답사만이 아닌 분천역 부역장님의 친절함에 답사의 편안함과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여름 초입에 들어가는 날씨라 봉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평소 철도와 관련되어 궁금하던 것을 주변 직원분께 여쭤보기 위해 역사로 들어갈 찰나 마침 부역장님께서 환하게 맞아주시고, 궁금증에 대해 알려주시며 시원한 음료까지 대접해주셨다.

 

부역장님께 코레일 VOC 레터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봄이 오기 전 분천역도 다시 한번 다녀올 참이다. 그때는 바로 진정한 산타마을과 체르마트역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

 

다양한 정취를 느끼고, 힐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친절을 베풀 때 또 그 친절을 소중하게 맞이해주는 것...

 

행복함과 편안함, 보다 삶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분천역 답사가 내게 줬던 소중한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덤으로 좋은 분들을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된 것도 값진 보물이었고.

 

 

분천역에서 배웠던 가치와 간직하게 된 추억을 거름삼아 다가오는 내일도 힘차게 살아볼까 한다. 

 

 

 

 

 

 

도경리역과 더불어 간이역 답사를 마음먹은 순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역 중에 하나가 바로 승부역이다.

 

승부역은 찾아가기도 힘든 곳인데다 영동선 특유의 열차마저 많이 운행되지 않아 대한민국의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날이 더웠지만 짜릿한 쾌감을 주던 곳이 바로 승부역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의 멋을 가진 역이야말로 승부역일 것이다. 각종 블로그의 여행기를 보면 계절마다 승부역의 멋을 담은 계절별 여행기가 끊임없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지에 있어 더욱 가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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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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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시로 승부역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겠다고 할 수 있다. 승부역의 상징인 이 시는 승부역에 근무했던 한 역무원이 쓴 시인데, 춥고 힘들고 오지속에 갇혀 지내던 간절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라 하겠다. 뒤에 나오겠지만, 어찌보면 시가 쓰여진 표지석은 사본이고, 원본은 역사 우측에 나온다.

 

 

승부역의 역사를 보면 승부역은 순탄하지 않았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역이었다.

 

1956년 1월 1일 현재 영동선의 근간이 되는 영암선이 개통되며 승부역은 바로 이때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1957년 7월 17일 과거 96년까지 존속했던 플랫폼 위의 역사가 완공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 울진군에 속해있던 승부역이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봉화군으로 편입되었다.

 

1996년 9월 17일 현재 승부역의 역사가 완공되어 승부역이 도약하는가 싶었지만 이듬해

 

1997년 10월 15일 보통역에서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2001년 9월 8일에는 배치간이역에서 신호장으로 떨어지면서 승부역이 아닌 승부신호장으로 처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1998년 환상선 눈꽃순환열차가 개통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론 승부역의 부흥을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다 3년 뒤

 

2004년 12월 10일 신호장인 승부신호장에서 보통역인 승부역으로 다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2013년 2월 21일 영암선 개통기념비가 등록문화재로 승격이 되고,

 

같은 해 4월 12일 영동선의 부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던 O트레인과 V트레인이 정차하게 되었으며, 일반열차인 무궁화호도 1691/1692 정동진 ↔ 부산 노선을 제외한 나머지 영동선 무궁화호는 모두 정차하는 역으로 변모했다.

 

보통역에서 배치간이역으로, 배치간이역에서 신호장으로, 신호장에서 다시 보통역으로 승격됐으니 승부역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대의 풍파를 모두 겪은 산증인이라 할 수 있겠다.

 

 

 

 

 

 

 

'승부역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드디어 승부역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지에 온 만큼 오지를 틈틈히 둘러보기 시작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영암선 개통기념비이고,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들어가서 유명해진 측면이 있다. 물론, 승부역은 단순히 영암선 개통기념비보다 곳곳에서 미적 시각과 미적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라 그야말로 오지속 자연을 몸소 느끼며 오랜 시간 생각해볼 수 있는 명소로 더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영암선 개통기념비 부근에 있는 승부역 주변 몇 안되는 민가인데, 따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옥수수밭과 자연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카메라에 한번 담아보았다.

 

 

 

 

과거의 모습에다가 요 근래 완공된 전철화까지 더해져있으니 정말이지 신구조화가 따로 없었다. 한편으론 승부역과 영동선이 완공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을지 쉽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승부관, 승부역의 관사인데, 여름과 겨울 내일로 시즌에 맞춰 내일로 여행객들에게 일종의 게스트하우스 형식으로 내일로 여행기간 동안 숙박을 제공한다고 한다. 승부관에서 오지역 승부역에서 나 자신과 고독한 승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승부시설사업소인데, 이 날 답사를 갔을 때도 승부역 주변에서는 선로보선원들이 더운 날씨 속에서도 시설 및 선로 보수에 여념이 없었다. 이분들이 있어 우리는 마음 편히 철도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승부역의 또다른 상징 "눈꽃마을 승부"란 표지석이 눈에 띈다. 표지석의 모양과 표지석의 글짜가 꽤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지점부터 냇가를 건너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건너편에서 찍은 승부역 주변 철교의 모습인데, 보기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듯이 사진에 각도에 따라 분위기가 또 달라지는 것 같다.

 

 

 

 

요 근래 살면서 물레방아를 본 적이 없었는데, 승부역에 오면서 10여 년만에 물레방아를 본 거 같아 왠지 모르게 더욱 기뻐했었던 것 같다. 물레방아를 비롯한 자연친화적인 조형물들이 있어 승부역에서 자신과 승부를 하는 것만큼은 정말 외롭지 않다.

 

 

 

 

"눈꽃마을 승부"란 표지석을 두고 조금 올라오면, 승부역의 먹거리 장터가 눈에 보이는데, 이 날은 따로 영업을 하지 않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사진을 찍고 나갈 무렵 마을 주민들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낯선 사람의 방문에도 반가워하며 승부역의 먹거리 장터 시설이 더욱 보강되어 올겨울에 준공(?)이 될거라며 겨울에 승부역에 꼭 방문하길 권한다. 사실, 승부역의 진짜 매력은 바로 겨울에 있으니까.

 

 

 

 

승부역도 그간 시설투자가 이루어졌는지 역 곳곳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목마타기 위에 있는 사진 위의 나무 한그루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 지조가 느껴진다.

 

 

 

 

승부역의 역명판인데, O트레인과 V트레인이 개통될 무렵 승부역도 양원역, 분천역과 동일한 방식으로 통일되었다.

 

 

 

 

승부역의 역사를 세 장을 연이어 찍어서 올리게 되었다. 승부역의 역사는 더없이 정이 느껴진다.

 

 

 

 

석포방향 선로인데, 사진 속 멀리 선로보선원들의 모습이 들어오며 이들의 모습에서 나 자신도 안정이 느껴졌다.

 

 

 

 

 

승부역의 출입구 승부현수교가 눈에 띈다. 사람들 한두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넓이인데, 출렁거리면 위험하다며 출렁거리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었다.

 

 

 

 

분천, 영주 방향 선로와 플랫폼인데, 곡선과 자연, 그리고 승부역의 붉은 역사가 어우러져 가히 환상이란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승부역의 붉은 우체통인데, 승부역의 간이 대합실에 비치된 엽서를 작성해서 보내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원을 담아 엽서를 보내는 것도 승부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승부역의 간이 대합실은 "세평쉼터"란 정식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빼꼼히 69.2㎢가 나오는 데, 승부역이 영주역 기점 69.2㎢에 위치하고 있는 역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승부역의 간이대합실 세평쉼터에는 승부역에 다녀갔던 여자 개그우먼들의 사인이 걸려있고,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 공지사항과 서적, 각종 포스터와 안내자료 등이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특히 조그만 의자와 난로가 비치된 게 꽤 인상적이었다. 또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스탬프가 이곳 세평쉼터에 비치되어 있어 엽서, 승차권, 기타 종이에 날인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알립니다'로 붙여진 공지사항에서 승부역은 승차권을 발매하지 않는 역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승부역은 차내취급역으로서 코레일톡이나 인터넷 예매, 창구예매가 가능한 역에서 승차권을 발매해야 하는 역이라 여행객들 입장에서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승부역에는 역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역(1인 근무역)이기는 하지만, 역직원은 운전취급만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승차권단말기도 없어 승차권 예ㆍ발매가 불가능하다.  

 

 

 

 

승부역의 상징이자 시의 원본이다. 처음에 올라왔던 기념비가 사본이었다면 말이다.

 

지금처럼 각박한 시대이기에 승부역이 더더욱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지친 일이 있을 때 아무도 없는 세 평 오지속에서 나 자신과 승부를 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있어 힐링이 되고, 재충전을 줄 수 있는 곳으로서 진정으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간이역(엄연히 보통역이지만)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시간과 장소를 주고, 마음을 다스리게 하며 쉬어가는 공간을 제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간이역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뒤에 나올 청소역과 더불어 승부역은 간이역의 본질에 충실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짓밟는 법만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기위해 아웅다웅하는 모습들, 각박한 세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끔씩이라도 승부역, 청소역 등 간이역에서 마음을 청소하고,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지는 아닐지언정 없어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 무인화가 거론되는 승부역처럼 유익한 역들이 하나 둘 없어지려고 하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던 시점에 접어든다.

 

사실, 양원역과 비동역의 답사는 예정에 없던 것도 있었겠지만, 양원역과 비동역의 존재조차도 인식이 없었다. 쉽게 말해 양원역과 비동역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이날, 승부역과 분천역의 답사를 가기 위해 철암역에서 V트레인에 탑승해서 동점역, 석포역, 승부역을 지나 도착한 역이 바로 양원역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역을 실제로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객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사진을 찍으러 내려갔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양원역을 보고 난 다음의 기쁜 감정이야말로 바로 이런 건가보다.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라고 조언을 많이 하는데,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뜻하지 않게 희망하는 것을 얻었을때 경제학적인 최대효용이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양원역은 1988년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113-2에 위치한 역이 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임시승강장이다. 임시승강장의 양원역이 생겨난 이유는 주변에 교통이 워낙 불편한 탓에 주민들이 직접 조그만 역사와 승강장, 역명판 등 역사시설을 만들어 여객열차 정차를 요구하면서 비롯되었다.

 

주민들의 노력과 청원으로 양원역이 임시승강장이나마 온전히 역으로서 여객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코레일에서는 여객열차 통과를 시키려고 했지만, 주변 교통이 워낙 열악했던 탓에 정거장으로 필요한 역사시설을 갖춘 녹동역, 거촌역, 문단역, 봉성역 등이 여객열차 통과라는 철퇴를 맞았을 때도 양원역은 꿋꿋히 여객열차가 정차하며 온전한 "역"으로서 "정거장"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즉, 양원역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역사이자 사람도 바람도 쉬어가는 간이역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객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눈에 띄었던 건 바로 양원역 대합실이었다. 양원역 대합실 옆에 양원역을 알리는 "양원"이라고 새겨진 조그만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이 조그만 비석이 바로 양원역의 진정한 역간판으로서 가치를 발휘하고 있었다.

 

 

시골의 조그만 버스 정류장처럼 보여도 양원역 대합실은 플랫폼에는 아기자기한 돌로 꾸며져있어 초라해보일지라도 자신이 진정한 간이역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 했다.

 

 

 

 

양원역 역사 내부에는 O트레인, V트레인, 그리고 일반열차 무궁화호의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가 적혀있었다. 비록 작은 어느 시골 간이역일지라도 역사로서 갖춰야 할 것들은 다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또, 인접역인 분천역에서 여객과 관련된 사항들을 붙여놓고,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양원역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간이역에서 볼법한 나무의자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놓여있었다. 비록 역무원도 없고, 승차권을 발권할 수 있는 매표창구도 없지만, 이 정도면 역이라 불리기에 손색없지 않을까? 엄연히 O트레인, V트레인, 그리고 무궁화호까지 정차하니 말이다.

 

 

 

 

양원역의 역명판인데, 양원역뿐만 아니라 승부역과 분천역도 양원역처럼 과거 오래전 방식의 역명판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역명판 뒤편으로 마을주민들이 열차 운행시각에 맞춰 손수 만든 식음료나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옛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것 같아 과거로 온 것 같은 추억의 회상속으로 빠져본다.

 

 

 

 

V트레인 2013년에 개시되면서 양원역뿐만 아니라 비동역, 승부역, 분천역, 철암역 모두 V트레인의 로고를 띤 별도의 푯말이 설치되었다. 역명판 역시 철암역을 제외하고는 양원역, 비동역, 분천역, 승부역 모두 같은 방식으로 통일되었다. O트레인과 V트레인이 각각 개설되어 교통이 열악한 태백, 봉화지역에 보탬이 됨은 물론, 지역경제에도 나름 도움을 주고 있었다.

 

 

 

 

분천역을 지나 승부역으로 다시 V트레인을 타고 오는 길에 찍은 비동역이다. 비동역 역시 임시승강장인데, 양원역과 달리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만이 이용할 뿐이다. 어찌보면 양원역보다 그 위치가 못할 수 있지만, 비동역 역시 주변에 멋진 자연적 경관을 자랑하기에 양원역과 우열을 가리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V트레인과 더불어 승부역에서 양원역, 비동역을 거쳐 분천역으로 이르는 트래킹 코스도 나름 인기있는 코스라 봄이나 가을 무렵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니 V트레인이야말로 소외된 오지에 있어 효자가 아닐까 싶다.

 

양원역과 비동역에 이어 크리스마스역 분천역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그냥 머리를 식히고 바람도 쐴 겸 다녀온 것이 도경리역이다.

 

도경리역을 다녀왔던 것도 순수하게 머리를 식히고 바람도 쐬고 싶은 것 딱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도경리역이 유명세를 탔던 건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고, 또 문화재청에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철덕들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도경리역이 요근래 유명해진 건 유명 가수들인 다비치의 "오늘 따라 보고 싶어서 그래" 뮤직비디오 촬영장소로 등장하면서 굳이 철덕들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도경리역의 부제 역시 가수 다비치의 "오늘 따라 보고 싶어서 그래"에서 따왔다. 포스팅을 하는 지금도 보고 싶은 역 중에 하나가 바로 도경리역이니까.

 

 

 

도경리역은 1939년 5월 15일에 역사가 준공되었다. 이후 194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가 1995년 1월 10일 역세권이 미약한 터라 승차권 차내취급역 지정되더니 1997년에는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2001년에는 신호장으로 더 떨어지고 말았다.

 

도경리역은 무배치간이역도 아닌 신호장으로서 열차의 교행을 위해 존재하는 역일 뿐이다. 애초부터 역세권이라고 해봐야 민가 몇 채가 고작이니 말이다.

 

 

이 날 도경리역을 찾아갔을 때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얼추 길을 찾아보고, 머리 식히러 바람 쐬러 떠난 길이었지만, 도경리역까지 가는 교통편이 자주 없다는 소식이 있었다. 특히, 도경리역 역시 영동선 아니랄까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하는 숨바꼭질 하듯 산속에 숨어있는 역이었기 때문이다.

 

 

 

 

한낱 신호장일 뿐이지만, 도경리역은 1939년 5월 15일부터 지금까지 역사가 오롯이 보존되고 있을만큼 정말로 유서깊은 역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인데다 박공형 지붕을 채택하고 있고, 무엇보다 역사 외관이 일본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어 철도 건축 역사에서도 정말로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

 

 

꼭 철덕이나 철도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도경리역의 역사를 보면 일본 훗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시골 간이역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얼마전 눈이 제법 왔는데, 도경리역은 여름도 여름이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미적 가치와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역 중에 하나다. 

 

 

겨울에 눈이 내리고 있는 도경리역에 있으면 일본 훗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시골 간이역에 있다고 해도 믿을테니 말이다. 그만큼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은 당연 도경리역이고, 영동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 역시 도경리역이라 자부한다.

 

 

 

 

도경리역은 2007년 여객취급이 완전히 중지되었는데, 이 무렵 영동선의 가장 오래된 역사이고, 철도 역사상 보존가치가 충분했기에 문화재청으로부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이후 삼척시에서 예산을 투입해 역사 개보수를 하여 지금도 나름대로 관리를 받는 귀하신 몸 중에 하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잊혀간 역들 대부분은 초라하게 방치되다시피 내팽겨진 역들이 부지기수니깐.

 

 

 

 

도경리역의 역간판은 과거 철도청시절의 역간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교육자산으로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도경리역의 화장실인데 이용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아마 잠겨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실제로 화장실이라는 푯말도 과거 철도청 시절의 서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화장실 옆에는 화분이 아기자기 놓여있어 역사의 품격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듯하다. 실제로도 화분의 관리가 되고 있는 걸보면 역시 사람이건 건축물이건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과거 여객취급이 중단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이곳으로 기차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사진 가운데에 집표함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집표함에는 세월의 흔적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내릴 때 넣어둔 승차권이 보이지 않았다.

 

 

 

 

역사 사진에서처럼 도경리역의 하얀색 도장과 겨울 하얀 눈이 절묘하게 시각적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도경리역은 진정 겨울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름이나 가을에도 운치있지만, 음식에 양념이 잘 어우러지면 환상의 맛을 표출한다고 하지 않은가? 바로 도경리역의 겨울의 하얀 눈이 도경리역의 보석보다도 더욱 값진 역으로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한다.

 

 

 

 

도경리역의 선로보선반 옆의 공간에는 침목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또, 위에 보면 141이라는 숫자가 보일텐데, 이는 영주역 기점 141km 지점을 뜻한다. 즉, 도경리역은 영주역 기점 141km에 위치하고 있는 정거장이라 하겠다.

 

 

 

 

일본 훗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시골 간이역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필자도 도경리역을 처음 밟았을 때 설렘과 더불어 일본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경리역에는 옛날의 모습들이 온전히 자리하고 있고, 역명판도 옛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위에 있는 나무들이 역사를 아름드리 꾸며주는 존재라 생각한다. 조동사나 조사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역무실에는 꾸준히 무전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열쇠보관함과 비상초함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특히, 역무실의 책상 위에는 철도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만한 전호깃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과거 여객운임표와 열차시간표가 고스란히 걸려 있었다. 무궁화호 1698과 무궁화호 1697은 과거 강릉 ↔ 영주간 다니던 열차인데, 과거 통일호 1243호 통일호 1244호를 계승한 열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무궁화호 1685와 무궁화호 1686으로 동해 ↔ 영주로 축소되더니 2012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첫장의 사진과는 다른 사진이다. 결국 플랫폼 방향 역사 사진을 두 장 찍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도경리역의 아름다움이 푹 빠졌었나보다.

 

 

 

 

갈 길을 재촉하기 위해 도경리역을 떠나는데, 낯선 사람의 발길이 경계됐던 듯 민가 주변의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그래도 바람 쐬러 머리 식히러 떠난 도경리역에서 제대로 힐링을 받고 간다는 기분이란 뭐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여름의 날씨라 덥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도경리역의 안내 표지판과 표지판 바로 옆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다. 사진에 보이는 버스 정류장은 미로, 도계 방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고, 삼척, 동해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반대편으로 길 건너 가서 탑승해야 한다. 길 건너갈 때 건설 차량이나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량들이 수시로 다니므로 통행에 각별히 주의하기를 바란다. 참고로, 버스에 탑승하고자 할 때는 버스가 보일 때 손을 흔들면 요금을 내고 탑승하면 된다. 시간이 된다면 도경리 마을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한,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기에 버스 시간을 필히 참고해서 답사에 불편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도경리역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황홀했던 도경리역의 포스팅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다음번에는 겨울에 하얀 눈이 내릴 때 도경리역에 꼭 다녀오기로 스스로에게 약속을 해본다.

 

 

 

 

 

 

포항공항 답사를 마치고 찍은 포항역의 사진이며

 

비록 두 장의 사진이기는 하지만 강릉역과 더불어 소중한 역사로 간직한 사진이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 선정한 방향과는 어울리지는 않지만, 현재는 옛 강릉역과 옛 포항역 모두 영업하지 않기에 이들의 가치는 환산불가라 할 수 있겠다.

 

 

 

 

 

포항역 맞이방과 포항역 역사 전경인데, 포항이란 곳을 처음 딛게 된 장소가 다름 아닌 포항역이었다.

 

또한, RDC라 불리는 전철과 비슷한 형태의 무궁화호도 생전 처음 타본 경험을 선사해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더 빠른 KTX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객차형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다니던 포항역이 더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간 살면서 몇몇 역들을 거치고 다녔지만, 본격적으로 철도역의 "답사"를 시작한 것은 옛 강릉역이 처음이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보면, 강릉역을 답사할무렵 철도에 대한 완벽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기보단 마침 강릉에 일이 있어 강릉역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카메라로 사진으로 남겨볼까란 생각에 다녀온 것이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유명하시고, 현직 한국철도공사 직원이기도 하신 스팀로코님의 블로그를 (lovtrout.blog.me) 보고, 쉬는 날 시간을 정해 역답사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 시기가 정확히 올해 초였다.

 

물론, 이전에 강릉역 이후로도 공항답사를 다니던 2014년 6월 무렵 포항역의 기록도 1~2장의 사진으로 남겨두기도 했고, 2015년 6월에도 머리식힐 겸 삼척의 도경리역도 다녀오기도 했다.

 

스팀로코님의 블로그를 보면서 간이역 답사의 나름 몇가지 방향을 세울 수가 있었는데, 관리역보다 능주, 대야, 승부, 신기, 희방사, 주덕, 삼탄, 반곡, 동화, 신림, 임기, 현동, 분천, 추풍령, 남성현, 신녕, 탑리, 옥산, 석항, 쌍룡, 추전, 동백산, 백산, 청소, 판교, 삽교 등 1인 근무지정역이나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는 역으로 정했다. 물론, 무인역(무배치간이역)은 될 수 있으면 제외했다. 역이란 역무원이 있어야 하고, 열차를 타려는 사람이 있어야 진정한 역이랑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기나 현동은 왠지 모르게 끌렸던 터라 가볼 생각이지만...

 

관리역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1인 근무지정역이나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간이역들을 답사하는 게 진짜 답사라 생각했고, 사실 역다운 역들은 승부역 등 1인 근무지정역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간이역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간이역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 기차를 타기 위해 강릉역을 한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영동선을 처음 접한 것이 2001년이었다. 강릉에서 동대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로 지루함을 느꼈다.

 

지금처럼 낭만적이고 감상에 쉽게 빠질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이후 13년이 지난 당시 2014년 강릉역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역의 영업중지를 불과 이틀 앞두고 다녀오게 되었다.

 

 

 

 

강릉역 역사가 13년 뒤에 찾아온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이기도 했는데, 바람이 불어 더위를 크게 느끼지는 않았던 날씨로 기억한다. 강릉역 역사 오른편에는 소위 말하는 근성열차로 잘 알려진 강릉 ↔ 부산 1691 무궁화호 열차가 승객들을 맞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진을 슬슬 찍기 시작했는데, 스토리웨이가 있었고, 무궁화호 옆에는 바다열차가 플랫폼에 있었다. 2014년에 바다열차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규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삼척역이 종착역이라고 한다.

 

 

 

 

역사에 들어와 처음으로 눈에 띄었던 건 바로 강릉역의 영업중지 안내문이었다. 강릉역이 영업중지가 되면서 강릉역의 여객업무는 정동진역으로 이관이 되었고, 현 강릉역 역사에서 정동진역까지 열차시간에 맞춰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셔틀버스에 대한 내용은 정동진역 포스팅에서 따로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이어 강릉역의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가 눈에 띄는데, 과거에는 청량리역에서 강릉역까지 새마을호가 한편 운행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새마을호는 온데 간데 없고, 무궁화호만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에 자리잡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새마을호보다 현재 서민열차라 불리는 무궁화호가 더 정이 가는 게 사실이다. 시간이 더 걸릴지언정 기차여행을 좀 더 할 수가 있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군상을 접할 수가 있고, 무엇보다 운임부터가 꽤나 저렴하니깐 말이다.

 

 

 

 

강릉역의 승차권 발매창구와 맞이방이다. 비록 이틀 뒤에는 영업중지가 되고, 정동진역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겠지만, 당시에도 강릉역은 자신의 역할에 꽤나 충실하고 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고객님!'이란 말이 꽤나 뜻깊게 다가온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배웅을 하는 것 같아 시원섭섭한 감정이 몰려온다. 시원섭섭함이란 바로 이런 감정을 가리켜 말하는가보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라는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별을 하게 되면 섭섭한 게 사실이다. 포스팅을 하는 지금 강릉역은 없어졌으니까.

 

그래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강릉역도 새롭게 다시 태어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