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영혼

 

 

 

 

 

동해역을 출발한지 30분을 조금 못 미쳐 신기역에 도착하였다.

 

 

열차를 타보는 것도 오랜만이고, 기차역을 답사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5월 하순의 시기라 어느덧 날씨도 봄과 여름의 경계에 해당했다. 움직여도 땀은 나지 않지만 더위를 느끼는 날씨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봄의 시간은 줄어들고 여름의 시간이 늘어가는 것만 같다.

 

 

온갖 고생을 하며 8000호대를 카메라에 담은 시기가 2019년 8월이니까 아홉 달이 훌쩍 지난 동안 아름답기로 소문난 태백선과 영동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들 노선의 시종착역이 강릉역에서 동해역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환승 수요를 위해서 무궁화호 RDC가 추가됐다는 점이다. 강릉역에서 동해역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겪으면서 마치 한 지역의 터줏대감이 어떠한 이유로 물러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터줏대감이 물러났는데 터줏대감의 영향력이 필요해서 이를 위해 또 다른 무언가가 생겼달까.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강릉선의 KTX가 동해역까지 연장됐다는 것도 많은 변화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덜컹 거리는 전기기관차와 객차 조합의 무궁화호가 아닌 가감속을 바탕으로 한 동력분산식의 전기동차 누리로가 운행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컬쳐 쇼크로 정의해 두고 싶다. 과거 여객열차의 주류가 객차형 열차였다면 이제는 전기동차를 위시로 한 동차형 열차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영동선과 태백선 등지에서도 객차형 열차인 무궁화호가 아닌 동차형 열차인 누리로가 운행되는 것을 보며 더욱 확실해졌다. 2018년에 충북선의 누리로를 탑승할 때도 그랬지만, 가감속이 좋아서 승차감도 상당히 편안한 느낌이었다. 객차형 열차의 투박함과는 다르게 동차형 열차의 세련됨이 훨씬 가까이 다가온다.

 

 

동해역을 떠나 처음 정차한 역이지만 탑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마저 내리는 사람도 나 혼자다. 1분 간의 정차시간이 지나 누리로는 출입문을 닫고 청량리를 향해 유유히 떠난다.

 

 

 

 

 

 

 

 

 

 

그간 몇 번 지나쳤던 곳을 이제야 마음먹고 찾아왔다. 한 번쯤 오겠다고 다짐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났을 거다. 이런 저런 것에 묻혀 살다가 오는 셈이다. 열차가 지나간 다음 플랫폼에서 도계, 태백 방향의 선로와 동해, 강릉 방향의 선로를 돌아본다. 역 주변이 조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황량하진 않다.

 

 

몇 번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산 중턱에 있는 듯한 기차역과 주변에 있는 마을이 보다 편안하게 다가온다.

 

 

 

 

 

 

 

 

 

 

영주역 기점 127.6㎞. 기점인 영주역까지 절대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 신기역의 역사

 

 

- 1940년 7월 31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 1950년 1월 29일  역사 소실

 

 

- 1958년 8월 1일  역사 신축 준공

 

 

- 1977년 7월 1일  화물 취급 중지

 

 

- 1992년 1월 22일  현재 역사로 이전

 

 

- 1993년 4월 10일  소화물 취급 중지

 

 

- 1997년 11월 20일 무궁화화 통일호 열차 정차 및 철도승차권 단말기 설치

 

 

- 2004년 4월 1일  통일호 폐지로 무궁화호만 정차

 

 

- 2010년 5월 17일  승차권 차내 취급 지정 및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 2020년 3월 2일  당역 정차하는 태백선 열차 누리로로 변경

 

 

 

 

 

 

 

 

 

 

관심을 많이 못 받는 역이라 역명판과 각종 표식에서 시간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모습이 더욱 고색창연하게 느껴진다. 낡았다고 멋이 없는 게 아니라 낡은 것 나름대로 멋은 있는 것이다.

 

 

플랫폼의 놓여진 벤치도 고색창연함을 배가시켜준다. 플랫폼과 주변 분위기와 뭔가 어울리는 멋이 있다. 예전이었다면 멋들어진 분위기와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더욱 어우러졌을 것이다. 열차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모습이 그려진다. 교통이 발달하고, 젊은층의 이촌향도가 가속화되고 시골 마을이 점차 힘을 잃어가면서 이런 모습도 점차 옛말이 되어 간다.

 

 

시간의 그림자가 기차역에서 느껴지는 모습이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맞이방의 출입문 주변을 동굴의 형상으로 꾸며 놓은 적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옛말이 되었다고 한다. 동굴의 형상으로 꾸며 놓은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역 주변에 삼척의 명소인 환선굴이 있기 때문이다. 삼척 역시 인접 도시인 동해와 마찬가지로 석회암 지대로 동굴이 발달한 곳이다. 듣기로 역에서 동굴까지 차량으로 10분에서 15분 내외의 위치에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지역의 명소를 적극 홍보하는 듯 했다.

 

 

동굴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나무가 구름사다리 형태로 방문객들을 반겨준다. 돌로 제작된 석재와 둥그스름한 돌로 둘러쌓인 조그만 텃밭에 있는 조형목이 아기자기하다. 역의 멋을 한껏 살려준다.

 

 

나무 덩굴 아래에 있는 벤치도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제격이란 생각이다. 산 중턱에 있는 역치고는 사람 친화적인 역이라 하겠다. 근처에 지나가다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 역을 방문해 쉬고 가는 것도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덩치와는 다르게 맞이방은 단촐하다. 규모는 단촐하지만 여객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불편함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객 수요가 미미한 탓에 2010년에 철암역과 함께 승차권 차내 취급역으로 지정됐다. 승차권 차내 취급역으로 지정되면서 승차권 발매단말기가 철거되었다. 한편, 철암역은 중부내륙순환열차와 백두대간협곡열차의 개통과 맞물려 승차권 차내 취급역에서 승차권 발매역으로 재지정되면서 매표창구가 다시 운영되기에 이른다.

 

 

승차권 차내 취급역으로 전환된 이후에 수요 부족으로 여객열차도 점진적으로 감축되어 지금은 상행 4회, 하행 3회 등 총 7회의 여객 열차만이 정차한다. 정차하는 열차를 보더라도 이곳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쇠퇴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교통의 발달과 인구 감소가 이어지면서 여객 열차의 감축까지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역사가 우뚝선 존재이다. 주변 마을과 비교해봤을 때 역사가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이질적인 점이 기차역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모습이다.

 

 

주변 민가와 큰 도로로 가는 길은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게 왠지 모르게 좋다. 낯선 사람의 등장으로 열렬히 짖어대는 개 말고는 전반적인 마을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편안하다.

 

 

가끔 시골 마을로 가고 싶은 이유도 조용한 분위기 속에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주요 기차역보다 이렇게 시골에 있으면서 역직원들도 있는 역들을 선호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분위기도 좋았고, 역직원들도 정말 친절했다.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 왔으면 걷는 것이 인지상정. 동해로 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길을 따라 걸었다.

 

 

 

 

 

 

 

 

 

 

동굴의 형상을 한 조형물을 통해 삼척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주변에 환선굴과 또 다른 동굴인 대금굴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환선굴도 유명하지만 대금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서 가치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사진에는 없지만, 길 건너편에 마트와 같이 운영되는 시외버스정류소가 위치하고 있다. 위치와는 다르게 기차가 아니더라도 역을 오고갈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건널목의 느낌이 뭔가 색다롭다. 건널목의 형태와 위치가 전에 보던 것과는 달라서 신기로웠다.

 

 

건널목하면 떠오르는 표지판과 구성 요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시간여행하기에 정말 충분했다. 편안함 속의 시간여행으로 정의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시 역으로 걸어가는 길이 따뜻하기만 하다.

 

 

 

 

 

 

 

 

 

 

역직원의 안내를 받아 기다리는 동안 8236호 전기기관차가 견인하는 무궁화호가 구내로 들어오고 있다. 1682 열차는 1682 열차인데, 내가 기존의 이용하던 것과는 또 다른 차이가 존재한다. 종착역이 강릉이 아닌 동해가 되겠다. 1682 열차 자체는 몇 차례 이용하던 열차지만, 행선지가 강릉이 아닌 동해란 사실이 신선하기만 하다.

 

 

이번에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타는 사람은 그저 나 혼자다. 신기역에서 겪었던 하루는 따뜻하고 마음 편안한 날이었던 데 반해, 한편으로는 시골 기차역들의 어두운 단면도 같이 보게 되어서 쓸쓸함도 공존했다. 불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시골 기차역들도 사람이 북적이고 마음 편안한 기분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지막 사진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찍었던 광장 방향 역사 사진이다. 이번 답사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개인적으로 잘 찍었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역사 사진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신기역에서 느꼈던 동굴과 철도 사이의 신기로움은 조용함과 편안함이었다.